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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이 없다고 열을 내던 나에게빈짱의 일상글 2020. 8. 20. 23:50728x90반응형
#시스템이 없다고 열을 내던 나에게
요새 유행하는 MBTI를 해 보니, 나는 'ISFJ', 용감한 수호자로 표현되는 ISFJ의 주된 특징은 아래와 같다.
내가 해놓고 어필 잘 못함
진정한 이타주의자
세심하고 꼼꼼한 성격
내성적이지만 때때로 사교적
존경받는 환경에서 포텐이 빵빵 터짐이런 유형에 대한 특징을 제하고, 내가 느끼는 나의 타입을 열거해보면,
1) 변화를 기피하고(?) 현상유지를 선호한다.
2) 정해진 일정이 틀어지면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는다.
3) 내가 하기 싫은 일은, 남도 하기 싫을 것이니 잘 맡기지 않는다.
4) 윗사람보다는 손아랫사람들과의 연대를 선호한다.
무조건 내가 옳다는 신념으로 지내온 것은 아니지만, 함께하며 의미 있는 결과를 내 온 동료들이 있었다. (일로 만난 사이라면, 결과가 중요하지 암.)
그런 내가 혐오하듯 싫어하던 '전 직장' 생각을 하며 오늘 포스팅의 제목을 메모장에 끄적여두었더랬다.
시스템이 없다고 열내던 나에게
좋아서 간 회사는 아니었지만, 빠져서 일을 하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회사는 지방에 있었고 신혼집은 서울. 주말부부 생활을 하며 화~목요일까지는 온전히 회사에 모든 것을 쏟아부을 수 있는 천혜의 환경에 놓여 있었으며 이제 막 셋업이 되어가는 회사였던 터라, 여러 가지 여건이 불비하여 숙소도 상무, 연구위원 등 어르신들을 모시고 아파트 한 채에서 공동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미 군대에서 단체생활에는 도가 텄던지라(단지 내가 어딜가도 막내는 아니었는데..) 생활에 큰 문제는 없었고, 눈치 보며 생활하는 데에도 점점 익숙해졌다. 그런데, 남자 대 여섯 명이 한 집에 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밤마다 토론회가 열린다. 주제는 물론 건전한 '회사의 발전'이다.
당시에 나는 '자재 구매'를 담당하고 있었다. 정교한 화학 식각을 통해 제품을 만드는 공법으로 사업을 영위하고 있는 회사였는데, 제조는 물론 자재의 구매부터 품질 관리까지 올리지 못할 의제는 없었다. 고로 토론회도 누군가 피곤해서 '오늘은 이만하시죠.'라고 운을 띄우지 않는다면 밤새도록 계속 이어갈 수 있는 환경이기도 했다.
이제야 개인적인 공간에 써 내려가지만, 전임 구매담당자는 대표이사의 먼 친척이었다. 그리고, 자재 납품회사로부터 꽤나 뒷돈을 받아가며 일을 해 왔다고 한다. 그 영향은 곳곳에 퍼져 있었는데, 심지어 모 업체 대표라는 사람이 납품을 와서는 내 주머니에 5만 원 지폐 열 장을 찔러 넣으며 부서원들과 회식이라도 하라고 하던 일까지 있었다.(나는 바로 경영지원실장께 이실직고하고, 어떻게든 그 업체를 배제하기 위해 열과 성을 다했던 기억이 아련하다.)
'총체적 난국'이라는 말은 이럴때 쓰라고 만든 말일까.
제조팀장(전임 구매담당)이 제조라인에 들어가는 날은 수율이 추락한다는 소문이 암암리에 돌지를 않나, 수율 떨어진 것을 남 탓으로 돌리려 애꿎은 개발팀장을 괴롭히던 회의시간의 망언들을 떠올리면 지금도 몸에 돌덩이가 생길 것 같은 기분이다.
군대에서 배운거라고는, 정직함밖에 없어서 매사 하나하나 따져 묻던 내가 얼마나 눈엣가시였을까. (그런데 심지어 전임자가 군대 선배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의 제언에 의해 회사에서 ERP를 적용하기로 하였다. (ERP : Enterprise resource planning, 전사적 자원관리) 자재부터 반제품, 완제품까지 추적 관리하며 나아가서는 출하제품에 대한 이력관리까지를 포함하는, 제조 프로세스 일련을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의 도입이라니! 두근두근했다.
게다가 발주하는 ERP는 기성품이 아닌 customized 사양이었기 때문에, 외주업체에서 일정한 기간 동안 우리 회사에 찾아와 개발을 위한 조사까지 하게 되었다. (신난다!)
생각보다 사전조사는 순탄치 않았다. 거꾸로 취조당하듯 이건 뭐냐, 저건 뭐냐라며 묻는 프로그램 외주업체 차장님이 힘들었다. 이제 와 생각하면 알면 알수록 더 사용하기 편한 시스템을 만들어 줄 수 있었을 텐데! 하고 깨닫는다. 인생이란.
몇 개월 노력을 쏟은 결과를 내가 목도하지는 못하였다. 급히 사세가 꺾이는 시기가 있어 적을 옮겼기 때문에 실제 완성된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게 되었는지는 지금도 조금 궁금하다. 초기 도입 당시에도 우당탕탕 문제가 많았던 것을 생각하면 썩 원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야기를 되돌려서, 나는 어떤 시스템이 없어서 열을 내었을까?
구매 담당자로서 응당 알아야 할 사실은, 왜 이 자재를 이만큼 많이 구매하는가?이다. BOM(Bill Of Material)이라는 용어가 있는데, 완성품을 생산하는 업체가 아니더라도 하나의 제품을 만들어 내는데 필요한 제 요소들에 대한 명확한 파악은 중요하다. 하지만, 얼마나 자재를 투입하며 제품을 만들고 있는데 분석하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앞만 보고 달리는 스타트업 경영자의 마음이 이런 걸까?)
와 정말 답답했다. 매일 밤이슬 맺힌 맥주캔을 따며 울분을 토하듯 토론회에 참여할 정도로 부글부글 속이 끓듯 했다. 당시의 내 마음은 애사심도 아니었다. 제대로 하고 싶다는 마음 하나뿐이었는데, 처음 경험한 사회생활은 정반대를 보여주었다.
그 시절의 경험으로 지금은 일본계 회사에서 일을 하게 되었지만, 지금도 실태를 보면 비슷하다. 어제 포스팅했던 '데이터 사이언스'를 공부하고 싶다고 생각한 계기도 그렇다. 시스템이 없다. 체계가 없다. 과거를 반추하는데 정돈된 데이터가 없다. 우리는 과거를 분석하지 않고 추억하는 회사다.라고 스스로를 증명하듯 시대착오적 운영을 하고 있다.
지금이라도 어떤가? 함께 회사의 데이터를 정리해보지 않겠는가? 열의를 갖고 임하는 사람은 적을 것이다. 그 효과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에 비하면 나는 이상을 상정하고 우선 해보자는 성격이니 더 답답할 수밖에.
명함 자동 등록으로 서비스를 개시한 remember에 적용된 커뮤니티에 누가 이런 취지의 글을 올렸더랬다.
'중소기업 사장님이 전산 시스템에 투자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좀처럼 댓글을 적지 않는 내가 처음으로 이 커뮤니티의 해당 글에 적어 둔 댓글은 아래와 같다.
사람을 갈아 넣으면 아웃풋이 나와서 아닐까요?
그리고, 막상 적용하려고 해도 경영자 스스로 시스템 도입을 통해서 어떤 효과를 보고자 하는지가 명확하지 않으면
관심도 없을 겁니다.
자연스레 방치했다가, 나중에 도입이 마무리될 즈음 "내가 원하는 건 이게 아니었다."며 돈 낭비했다고 지적받는 모양새도 예상되네요.경영자 마인드로 회사를 보지 못하고, 효율만 생각하는 우둔한 직원이라고 비꼬는 사람도 있겠지만, 결국 과거와 지금 이 순간을 꼼꼼히, 그리고 정확하게 살펴보며 미래를 예상하고 대비하는 것이 경영자가 할 일이 아닌가? 더 쉽게 도와드리려는데요?
그렇게 답답한 마음에, 막 서른 살이 되던 그 해에는 시스템이 없다고 그렇게 열을 냈었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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