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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훈계? 훈수?
    빈짱의 일본회사, 일 이야기 2020. 5. 24. 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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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훈계? 훈수?

    참 쉽다 그쵸? / picture by 캡틴.

     

     

     

    군대에서 소대장으로 근무할 때부터 문서 작업을 참 많이 했습니다.

    소대 훈련계획을 작성하다가, 선임 소대장이 되면 중대규모의 훈련계획도 초안을 작성하게 되었죠.

     

    전역 전 2년정도는 사단급 부대에서 정보처 참모업무를 하며,

    예하부대(隷下部隊)의 보안감사 계획을 작성하고, 감사를 마친 뒤에는 보고서를 작성하기도 했습니다.

      *와, 예하부대에 사용하는 '예(隷)'가 노예의 '예'와 같다니.. 충격.

     

    모든 보고서는 스스로 완성되지 않았고,  상급자의 확인과 검토를 통해 완성되었습니다.

    부대장, 참모 등 상급자에게 작성한 보고서를 검토받으러 들어가는 순간은

    따로 참모실 / 부대장실이 없다 뿐이지 일반 회사생활과 많이 다르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어깨너머의 모니터 화면에 멋대로 입력되는 수정 문구가, 

    때로는 책상 위에 놓인 보고서 초안에 휘갈기듯 빨간 모나미 수성펜 메모로,

    새로운 보고서가 된 듯, 대부분이 갈아 엎어지는 순간도 있었고,

    간단한 표현을 수정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어떤 보고서를 작성하더라도, 그렇게 대부분의 보고서에 수정이 필요한 내용을 첨삭받았습니다.

     

    많은 보고서를 작성하고 검토받는 동안,

    놓친 부분에 대한 지적도 있었고, 실무자로서 더 자세한 내용을 담고 싶은 욕심에

    구구절절 들어간 설명에 대해 가차 없이 조정토록 지시를 받기도 했습니다.

     

    이 와중에 가장 많이 든 생각.

     

    "와 훈계(훈수)는 참 쉽다."

     

    정말 그렇지 않나요? 아무리 초안이라고는 해도 한 번에 통과하는 일이 없더라고요.

     


     

    사회생활을 하며, 매 월 회사에서 지원해주는 도서 구매비용이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꼭 사고 싶었던 책을 고이고이 장바구니에 담아두고,

    많은 책들 중에 몇 권만을 골라서 사야 하는 간절함은 적습니다.

     

    퇴근길에 슬쩍 서점에 들러서는, 베스트셀러 코너부터 한 바퀴 빙- 돌아보며 

    그때 눈에 들어오는 제목 또는 끌리는 테마의 도서를 한 달에 두, 세권 정도 골라 볼 수 있는 여유가 있습니다.

    그래서일까, 상대적으로 자기 계발 서적을 많이 찾는 편입니다.

     

    일 잘하는 방법, 글 잘 쓰는 방법에 대한 책을 참 많이 사고 읽었던 것 같습니다.

    보고서는 두괄식이 좋다. 결론부터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어야 한다. 최대한 간단하게 말하는 힘을 길러라는 등.

    읽는 동안에는 맞는 말인 것 같지만, 책을 덮고 나서 일터로 돌아오면

    왜 여전히 첨삭으로 점철된 보고서와 마주하게 되는 걸까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지적이다.', '실무자인 나보다 얼마나 더 자세하게 알고 계시는 걸까?' 

    답답한 마음도 끝이 없어 힘들어하던 중에, 군부대에서 상관으로 모시던 한 참모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더 이상의 진급 없이, 정년까지 근무하시고 퇴임(제대)하실 예정이라서인지

    매사 여유가 있고, 급한 길도 돌아가시는 인품에 답답하기도 했지만 부서 안의 부하들을 아끼시는

    마음이 따듯한 분으로 기억합니다.

     

    보고서 초안을 들고 참모실에 들어가서는, 일반적인 보고보다 두 배 정도의 시간을 들였습니다.

    말씀하시는 속도가 느리거나, 의도를 잘 이해하지 못해서 몇 번이고 묻고 답하는 순간이 반복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그날도, 빨간 모나미 수성 사인펜으로 첨삭 내용이 적힌 보고서를 받아 들고 돌아가려는 때에

    참모님께서 툭, 던지신 한 마디가 아직도 많은 위로가 됩니다.

     

    "다들 참 못됐지. 스스로 이렇게 보고서를 만들라고 하면 못 할 사람들이 대부분일 거야 아마..

      그런데 신기하게 누군가 만들어 온 자료에 훈수들은 그렇게 잘 두더라니까?"

     

    제 처지를 안타깝게 보셔서인지, 아니면 본인의 젊었던 때를 회상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이 10년이 지난 지금도 마음에 남아있습니다.

     

    마냥 옳은 말이라고는 못하겠습니다. 

    10년을 보내면서, '보고자로서의 책임, 무게'로부터 피할 수 있는 장점도 알게 되었고

    여전히 저는 실수투성이인 데다, 스스로 무언가를 완성하거나

    완결 지어 본 경험이 적은 사회초년생 같은 사람이거든요.

     


     

    하지만, 그 시절 참모님의 말씀을 듣고는 옳다고 믿게 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잘할 수 있을지는 지금도 앞으로도 자신이 없지만, '천천히 흥분하지 않고 다시 돌아보기.'

    알맹이가 같은 첨삭도,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갖게 되었으니

    언젠가 함께 일을 하게 될 누군가에게는, 향상심을 줄 수 있는. 함께 성장하는 느낌을 받으며

    좋은 영감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기 위해 '말하는 방법'에 더 많이 고민해보려고 합니다.

     

    당장 다음 주 출근해서 만들고, 보고해야 할 자료들부터 잘 살펴봐야 하는 퍽퍽한 인생이지만

    꿈도 꾸고 가끔은 이렇게 적어봐야 더 제 것이 된 것 같은 마음입니다.

     

    남의 훈계에 답답할 땐, '나라면 어떻게 이야기할까?'라고 생각해보고

    실제로 남에게 그렇게 한 마디 건네는 사람이 되어본다면, 점점 바뀌어가지 않을까 합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포스팅에서 다시 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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