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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화장실 철학'
    빈짱의 일상글 2020. 3. 20.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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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화장실 철학

     

     

    만국 공용, 만국 공통 마크 / Photo by  Tim Mossholder  on  Unsplash

     

    당신은 가지고 있나요? 당신만의 철학.

     

     

     

    오늘은 나의 '화장실 철학'에 대해 글을 남겨본다.

    그래, 나에게도 있다. 누구에게도 말해본 적 없는 나만의 '철학'이.

     

    '기술영업' 이라는 일 때문에 자주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게 된다.

    대기업의 연구개발단지에도 들러보고, 산 중턱에 자리 잡은 부품회사에도,

    공장형 오피스텔의 사무실도 다녀보았고, 강남 한복판에 있는 본사 건물까지.

     

    돌아보면, 나 스스로의 의지로는 절대 일으키지 못했을 정도로 왕성한

    활동범위와 함께 많은 곳들 돌아다녔다.

     

    경우에 따라, 주차장 환경이 좋지 못해 번거로웠던 기억도 꽤나 많지만

    그전부터 마음속에 가지고 있었던 - 말이나 글로는 누구에게도 표현해

    본 적이 없는 - '화장실' 에 대한 철학이 생겼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나는 낯을 많이 가리는 사람으로 자라왔다.

    남에게 나의 의사를 표현하기를 삼가고, 배려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생각하여

    자연스럽게 순응하는 시간을 보내왔다.

     

    '좋은 게 좋은 것' 이라는 생각은 보기 좋게 내 엉덩이를 뒤에서 걷어찼다.

    모든 순간을 다 기억하지 못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화장실의 가장 참담한 추억이 하나 있다.

     

     


    비가 제법 내리는 날이었다.

    아마도 장마였던 것 같다.

     

    국민학교에 다니고 있었지만, 몇 학년이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나는 5학년까지 '국민학교'를 다닌 세대이다.)

     

    내가 살던 곳은 단지수가 밀집한 아파트촌이었고, 그 날은 학원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부모님이 사주신 옷 중에 손에 꼽을 정도로 좋아하던, 밝은 연두색에 무릎까지 오는

    그리 두껍지 않은 코트를 입고 있었다.

     

    비가 올 것을 예상하지 못했던 나는, 어떻게 집에 돌아가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아이의 걸음이라면, 15~20분 정도는 걷다 뛰기를 반복해야 돌아갈 수 있는 거리.

     

    집에 연락하는 것을 포기하고, 비를 맞으며 오르막뿐인 귀갓길에 나서기로 했다.

     

     

    좋아하는 코트가 점점 비에 젖어 짙은 남색의 칼라가 먼저 축축해지기 시작했다.

    속눈썹을 타고 뚝뚝 떨어지는 빗방울들을 털어내며 오르막을 걷던 중에

    반갑지 않게 소변이 급해졌다.

     

    급해진 상황만큼 빠르게 주변을 살폈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귀갓길의 한가운데 있었고, 시작 또는 끝을 향해 걸음을 재촉하지 않으면 

    지금 이 곳에선 어디도 들러 해결할 수 있는 건물이 없다고.

    급해진 마음과 함께 서두른 만큼, 상황도 빨리 나빠졌다.

     

    급박한 상황에 대한 묘사는 접어두고, 나는 그날 실수(?)를 했다.

    아직도 내가 이 날을 기억하는 건 실수보다는 좋아하는 코트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집에 돌아가서도 혼이 나기는 했겠지.

     


    지금도 나는 장이 약한 편이다.

     

    한여름에 덥다고 에어컨 바람을 맞고 있으면, 몇 분 지나지 않아 화장실을 찾게 되고.

    겨울이면 춥다고 앉는 자리마다 찬 시트에 금세 부글부글 대는 신호를 보내온다.

     

    허겁지겁 맛있는 식사를 하고, 가게를 나서자마자 화장실에 들르는 것은

    이제 '루틴' 이라고 말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의 습관이 되어 있다.

     

    앞서 언급한 직업적인 이유와 겹치게 되면,

    약속시간보다 빨리(화장실에 한 번 들를 여유만큼) 도착해서 준비할 수 있는

    마음가짐도 생기게 되어 좋다고 생각했던 때도 있지만,

    어디든 약한 구석이 있는 몸은 기쁘지만은 않다.

     

    자주 화장실에 다니다 보니, 나름의 기준이 생기게 되었다.

    오늘 하루의 동선을 떠올려 본 후, 미팅 전 또는 식사 후에 들를 수 있는

    '화장실' 을 자연스럽게 연관 짓게 되더라.

     

    당연히 기준은 깔끔하고, 방문객을 배려하는 구조의 화장실이 된다.

    방문한 사람들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화장실을 잘 마련해둔 건물에

    가게 되면, 미팅 전부터 마음을 고쳐먹는다.

     

    "오늘 뵙는 분들께는, 평소보다 더 적극적이고 좋은 내가 되어야지." 하고.

     

    '화장실 철학' 이라고 거창하게 써두고 여기까지 오게 되니,

    조금 창피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기준을 정리해보았다.

    '이런 점들을 중요하게 생각했구나!' 싶었다. 그리고 기준이 꽤 많았다.

     

    아마 더 있을거다. 분명히.

     

    화장실로 모든 것을 판단해버리는 이상한 사람이어도 좋다.

    반대로 내가 회사를 운영하거나, 가게를 차리게 되어 입주한 상가가 있다면

    깨끗하게 잘 사용할 용의가 있고 더 나아가 잘 관리되도록 비용도 지불할 마음이 있다.

    나도 매일같이 사용하게 될 공간이니까.

    (지금의 나라면, 처음부터 사무실이나 가게 자리를 상가 화장실을 보고 고를 것 같다.)

     

    너무 나가다 못해 조금 우스운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화장실이 '배려의 공간' 이었으면 한다. 

     

    마음이 힘들 때 잠깐 도망치듯 사무실을 나와, 좌변기 커버에 걸터앉아

    괴로운 기분을 놓아두고 가는 편안한 공간이었으면 좋겠다.

    누군가에게, 누구에게나 그런 공간이라고 모두가 생각하고 

    깨끗하게 사용하는 공간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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